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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28호][칼럼] 불충분한 증거 속에 행동을 결정하기
작성자 관리자 (2013.04.29 09:47) 조회수  1812

불충분한 증거 속에 행동을 결정하기

 - 유영진(인제대학교 상계백병원 암센터 교수)

민주노총과 인의협의 권고로 직업병 판정위원회에 참석하게 되었다(전문용어로 하면 엮이게 되었다). 처음 회의에 나갈 때는 “억울한 사람을 줄이자”는 단순한 마음가짐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위원회에 접수되는 증례들은 모두 애매모호한 증거가 있는 것들이었고, 참석하는 위원들 모두가 사안들이 애매모호하다는 것 자체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보자. 1990년대 모 전자회사에서 근무하던 A씨는 근무 3개월 후에 재생불량빈혈이 발병하였고 투병 끝에 결국 사망하였다. 유가족들은 직업병으로 인정해달라는 탄원서를 냈으나, 작업환경측정 결과 벤젠 등 유해물질은 검출되지 않았다. 이 증례는 직업병판정위원회에 회부되었고 위원들끼리 갑론을박이 있었다. 직업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재생불량빈혈은 분명한 원인 물질 없이 발병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유해물질에 의한 발병이라고 보기에는 근무기간이 너무 짧고, 무엇보다 작업환경측정에서 유해물질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직업병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실제로 근무하던 1990년대가 아닌 최근에 작업환경을 검사하여 유해물질이 검출되지 않았지만, 보다 열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1990년대에는 작업내용으로 볼 때 벤젠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벤젠은 단기간 노출되어도 재생불량빈혈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직업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유해물질이 검출되지 않아도 직업병이라고 판정하려면 작업환경측정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발했다. 결국 어느 쪽도 과반수의 위원을 확보하지 못하여, 이 건은 보류로 결정되었다.

위 건은 직업병이라는 확고한 증거도 없고, 직업병이 아니라는 확고한 증거도 없다. 위원 중 한 분은 증거가 없는 사건을 판정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투덜거렸지만, 확고한 증거가 있었다면 위원회까지 와서 논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개연성”이라고 생각한다. 직업병이 분명하다는 증거는 물론 없지만, 아니라는 증거도 없을 때, 유해물질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면 즉, 개연성이 있다면 직업병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찬성하지 못하는 의사들은 원인-결과라고 증명하려면 보다 더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원칙론적 입장에 서 있다. 위 증례를 학회에서 발표하였다면 그 생각이 옳을 수 있다. 의학적인 원인-결과는 보다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위 증례를 전자회사의 유해환경 때문에 발병한 재생불량빈혈이라고 학회에 보고하면 많은 비판을 받은 가능성이 있으며 내가 논문 심사위원이라면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논문출판을 거부할 것 같다.

직업병판정위원회에서는 직업병으로 판정을 하고, 학회에서는 원인-결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상호 모순이 아닐까? 내 생각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떤 판단을 할 때 그 판단이 초래할 결과를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항상 정치적이다. 직업병판정위원회의 목적은 직업병임에도 불구하고 직업병으로 판정 받지 못하는 억울한 노동자를 줄이자는 것이다. 직업병판정위원회에서는 직업병임에도 불구하고 직업병 판정을 못 받는 억울한 노동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반면 학회는 정확한 인과관계를 밝혀 의심할 수 없는 지식들을 쌓아나가는 곳이다. 학회는 잘못된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진실인 것처럼 호도되어 그 명제 위에 다른 지식들이 사상누각으로 쌓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서로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 두고도 결론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판단을 한다. 임상의사로서 애매모호한 환자들을 다루며 임상적인 판단을 한다. 이 때 판단의 원칙은 가능성이 높은 것도 있지만, 그 결과의 중대함도 고려한다. 어느 환자가 위암일 가능성이 40%라면 위암이 아닐 가능성이 60%로 더 높으므로 위내시경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애매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고, 불충분한 증거 속에서도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판단을 하여야 한다. 그 판단은 자신이 서 있는 입장, 자신이 보는 관점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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