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칼럼

[뉴스레터133호][칼럼]‘항산(恒産)과 망민(罔民)’
작성자 관리자 (2013.09.30 15:55) 조회수  1717

‘항산(恒産)과 망민(罔民)’

 - 김진국(생명문화연구소 소장, 대구경북 인의협)

일정한 생계수단이 없어 막다른 골목에 이른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단순절도에서부터 폭력에다 살인으로 이어지는 흉악범죄까지 그 양상들이 다양하겠지만, 생계 수단이 막연하여 극단적인 선택으로 저지르게 되는 범죄를 대개 생계형 범죄라고 한다. 

그런데 저 아득한 고대사회에서도 생계형 범죄가 늘 사회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맹자는 사람이 일정한 생계수단이 없으면 늘 한결 같은 마음을 유지할 수 없다(‘無恒産, 無恒心’)고 하면서, 백성들에게 일정한 직업이나 생계수단을 마련해주어야 할 군왕의 책임을 강조했다. ‘민생(民生)’을 입에 올리는 군왕이라면 무엇보다 백성들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부터 마련해주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하여 군왕이 백성들에게 일정한 생계수단을 마련해 주지도 않으면서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처벌하는 것은 백성을 그물질하여 잡아들이는 것(‘罔民’)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최근 맹자가 말한 이 항산과 항심이란 말이 고위공직을 지냈던 한 법관의 입에서 흘러나와 세상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공직을 은퇴한 뒤에 한 편의점의 종업원으로 변신하였고 그 모습이 언론에 공개됨으로써 은퇴공직자의 귀감이 된 듯 온 세상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랬던 그가 편의점 종업원 노릇을 한 지 반년을 채 못 넘기고 다른 퇴직 법관이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고액 연봉이 보장되는 대형 로펌에서 고문 변호사라는 직함으로 새 둥지를 마련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낯간지러운 변신을 합리화하기 위함이었던지 불쑥 내뱉은 말이 바로 맹자의 항산과 항심이란 말이었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 편의점 종업원 신세가 되어보니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아무래도 이거저것 그리 마음이 편치 않더라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런데 맹자는 힘없는 서민들이나 백성들은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유지될 수 없다고 했지만, 선비(士)라면 항산이 없어도 항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선비라고 해서 재물이 하늘 에서 그냥 떨어지지 않는 이상 어찌 식솔들의 하루 세끼 끼니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마는, 맹자의 말은 적어도 선비 정도의 수양을 하고, 또 그런 인격을 갖추었으면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절박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일관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가르침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고대 사회의 선비라는 신분의 개념과 그런 선비의 처세 윤리가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의 법관이라는 신분이 지녀야할 처세의 윤리와 같을 수는 없고 또 그렇게 강요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법관의 신분으로 한국 사회의 최고 공직에 올랐다 은퇴한 사람이 무지렁이 백성들에게나 적용되는 옛 말씀으로 자신의 처세를 합리화하는 것은 왠지 어색하고 궁색하기 짝이 없다. 

그의 말은 이 시대 우리 사회의 고위 공직자들이나 법관들의 수준은 지난 시절 선비들의 윤리의식이나 인격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는 것을 자백하는 꼴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무엇보다 그가 법관으로 살아오는 동안 생계가 막막하여 항심을 지키지 못해 범죄를 저지른 뒤 법정에 끌려온 생계형 범죄자들에게 과연 어떤 처벌을 했는지가 궁금하다. 무책임한 군왕의 그물질에 걸려든 백성들에게 국법의 지엄함만을 과시하던 법가(法家)의 통치술을 신봉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새 정부가 출범한지도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뒤숭숭하다. 하늘하늘 힘이 없어 훅 불면 꺼질 것 같은 촛불들의 행렬이 몇 달째 좀처럼 끊어지질 않고 있다. 지난 대선 때 국정원이 했던 역할에 대해 항의하는 민심의 불꽃들이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 지금 묻고 있다. 지난 대선이 진정 공정하게 관리되었는가를? 그가 해야 할 말은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라는 고상한 옛 말씀이 아니라 촛불을 든 시민들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지난 대선에서 그는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해야할 책임을 맡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경산신문 9월 9일자에도 실렸습니다.
 
리스트
  전체의견수 (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notice [공지]칼럼 게시판 이용안내 관리자 2004.06.14 7016
219 [뉴스레터136호][칼럼] 공중화장실보다 가벼운 국가기간사업들 관리자 2013.12.16 3482
218 [뉴스레터 135호] 정부가 말해주지 않는, 그러나 꼭 알아야 할... 관리자 2013.11.22 3243
217 [뉴스레터134호][칼럼] 인의협의 새로운 공동체적 성장을 위해 이상윤 2013.10.30 1477
[뉴스레터133호][칼럼]‘항산(恒産)과 망민(罔民)’ 관리자 2013.09.30 1717
215 [뉴스레터132호][칼럼] 중증질환 의료비 책임지겠다던 박근혜 ... 관리자 2013.08.29 1753
214 [뉴스레터131호][칼럼] 메디텔, ‘병원-보험자 모델’을 허용해... 관리자 2013.07.24 1655
213 [뉴스레터130호][칼럼] 의대생에게 실습을 허하노라? 관리자 2013.06.18 1941
212 [뉴스레터129호][칼럼] 만성질환 시대, 한국의 선택은? 관리자 2013.05.29 1648
211 [뉴스레터128호][칼럼] 불충분한 증거 속에 행동을 결정하기 관리자 2013.04.29 1811
210 [뉴스레터127호][칼럼] 진주의료원 휴폐업에 반대하며.. 관리자 2013.04.15 1672
209 [뉴스레터126호][칼럼] 진주의료원 존속 여부는 정부 공공의료... 관리자 2013.03.25 1876
208 [뉴스레터125호][칼럼] 그래, 봄이다. 꽃구경 가자! 관리자 2013.03.13 1781
207 [뉴스레터124호][칼럼] 의사들에게 바라는 것 관리자 2013.02.20 1724
206 [뉴스레터123호][칼럼] 노환규 의협회장의 인수위 ‘제안’을 ... 관리자 2013.01.28 1806
리스트
1  2   3   4   5   6